회화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감상자가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 가정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회화를 감상하고 사유하는 일은 그 내부로 향하는 행위이고, 평면의 공간은 세계의 틈이나 창문에 비유되기도 한다.
나 역시 회화를 외면과 내면이 조우하는 공간이라 생각하거나 일종의 창문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러한 관점이 괜시리 낯간지럽고, 과대망상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어찌 보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철저히 자폐적이고, 바타유의 말을 빌리자면 지극히 망막적이다. 또한 훼손 욕구에서 비롯된 본능적 행위인 동시에 역사와 권위를 포함하는 의식적인 행위이다. 그런 한계와 모순이 싫으면서도 좋기 때문에 이 비생산적인 생산을 자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실을 흘끔거리게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현실과 유리되게 만드는 매체만의 특성이 곧 작업의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이었는지, 심리 상담을 받을 때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떤 선생님과의 면담 중에 "수많은 타인을 그리는 것이 자기통합의 과정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는데, "그 행위가 오히려 극단적 분열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얼빠진 얼굴로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는 게 아니라 튕겨져 나가길 원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응시'가 아닌, 시선과 시선이 부딪히는 경험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림을 본다는 감각이, 그림을 향한 나의 시선이 되돌아오는 순간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깝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작업으로서 그림을 보는 것이기도 하고 그림에게 보여지기도 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다.
우리는 동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동물에게 보여지는 순간이 훨씬 많을 것이다. 시골에 가면 어두운 밤중에 개 짖는 소리만 들린다거나 적목 현상으로 반사된 동물의 눈동자를 마주칠 때, 내가 그곳을 지나가기 전부터 이미 그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헤진 거미집 같은 한 집에 동거하는 벌레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 역시 비슷하다. 시선은 언제나 주체의 소유물이라기보다, 의식되는 순간 발생하는 관계에 가깝다.
지난 여름 파주에 위치한 "캠프그리브스"에 다녀왔다. 이는 DMZ 남방한계선에서 2km 떨어진, 민간인출입통제선 내에 위치한 구 미군기지다. 그곳의 인적 드문 공간에 갔을 때,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슴의 시선을 느꼈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박제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사슴이었던 것의 외피를 두른 우레탄 덩어리)에게 '보여'졌다.
정확히는 보여졌다고 의식했다. 물론 얼굴로 인식되는 기호가 있었고, 실제 털과 뿔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그것이 고철 덩어리나 나무 토막 같은 사물이었다 하더라도, 존재감을 의식하기만 했다면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귀신이 왜 있겠는가. 모든 시선의 존재 여부는 실재의 문제가 아니라 투명도의 차이다. 각자는 온전한 주체가 아니라, 시선이 오갈 수 있는 반사면에 가깝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창문과 캔버스는 형태와 기능 면에서 유사하지만, 회화는 결국 물리적으로 막혀 있는 지지체 위에 박제된 상이다. 통과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시선이 멈추고 되돌아오는 표면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회화가 거울처럼 현실을 그대로 반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회화는 왜곡된 반사면에 가깝다. 오목거울, 볼록거울, 깨진 거울, 때가 껴서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거울…. 온전히 상을 비추는 맑은 거울 같은 그림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은 기어이 그 표면 위에서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마치 프로젝터가 투영하는 흰 벽처럼, 타인의 모습을 비추기만 하고(타인을 받아주기만 하고) 자신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불안에 근거한 반응이라고, 상담 선생님이 말했던 것 같다. 나는 그 불안이 세상을 불신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은 세상으로부터 거리 두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거리를 둔다고 보는 게 맞다. 어찌 보면 그 거리를 좁힐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비겁한 속성을 내 정체성 중 하나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거리 두기를 당하고 행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고 혼재될 수밖에 없다.
보고, 보여지고, 보고, 보여지고… 회화는 이 반복적인 행위가 누적된 기록물이다. 형상을 재현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대상화를 거치지만, 동시에 나 또한 인간으로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타인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에 대상 안에 포함된다. 시선이 얽혀 있는 한, 자의식이 붙어 있는 한 이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분리될 수 없는 시선의 교차를 반사 거울의 이미지로 설정하고, 거울과 거울 사이에 저마다의 거리값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 거리값을 일종의 필터처럼 나의 시선에 씌워 그려보는 것. 지금의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다.
대상이 물리적으로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상태보다는, 대상과 가까이 있어도 각자의 상이 투명도가 낮거나 왜곡되어서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 더 가깝다. 불신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상태를 이미지 세계로 끌고 와 이미지의 생성 의도와는 다른 물리적 표면 만들기 — 어쩌면 회화라 부르는 — 에 활용해보기로 한다. 이 한계는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비출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얼만큼 왜곡할 것인가?'라는 내면의 물음으로 변하고 있다.